어느-동명이인의-소설
To. *** ( 이 편지는 반송이 되어 돌아왔다.) 국내부터 해외 소설까지 몇 년 동안 모은 거대한 책장이 드디어 손톱만한 빈 공간만 남았어. 그리고 책장의 마지막을 장식할 책을 고르러 가기 전 일종의 의식처럼 난 머리는 감아.  지식인이 된 듯한 약간의 기대와 함께 단골 서점으로 향하는 횡단보도를 건너자 머리까지 감은 내 노력은 흔적도 없이 사리졌지.  바로 A4 용지 한 장 달랑 붙인 채 서점 입구에 셔터가 내려져 있던 것.  [코로나 및 화장실 보수공사로 임시 휴무].  구겨진 종이도 모자라 이런 악필은 처음이었다? 선한 줄
  • 2년 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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항동철길의-프리윌리
  ​  프랑스 남쪽 소도시 깐느에서 황금종려의 낭보가 날아온 바로 그 날.    감독지망생 봉준오(27, 남) 군의 촬영장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.    오. 저 지친 모습들을 보라.  영원히 조감독일 수밖에 없어 슬픈 조감독 조아진(28, 여) 양. 그녀는 한 손에 인쇄된 콘티를 또 한 손에 자기 머리를 움켜쥔 채 쪼그려 앉아있다. 웃지 않아도 생기는 그녀의 깊은 보조개 속에는 이미 시마이しまい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 듯 하다.    스포츠토토 매니아이자 스페인어 능력자면서 죽기 전엔 엘 클라시코를 직관하겠다 떠들고 다니는 촬영감
  • 4년 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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메소드
 지금 장소로 이사 오기 전. 상영관을 정리할 때의 이야기다.    집기는 이미 모두 팔거나 나눔하여 정리가 끝난 후였다. 내부를 원상복구 시킬 일만 남아있었고 약속한 날짜 이른 아침에 철거반이 도착했다. 빠루 삽 오함마 등등을 들고 들어온 그들은 일제히 분진마스크를 쓰더니 반장의 지시 하에 벽과 바닥을 부수고 뜯어내기 시작했다.    3년간 애와 증 그리고 정이 쌓인 공간이 박살난 채 포대자루로 쓸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사가 복잡했다. 와중 오다기리 조처럼 멋지게 수염을 기른 인부 한 사람이 포대에 찢어진 포스터를 쑤셔
  • 4년 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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로맨스-소설
 "로맨스 소설 써보는 게 어때."  다영이 말했다.  민재가 바라보았다.  한강. 어느 벤치. 그날은 다영이 부평의 어느 작은 공장서 퇴사한 후 처음 맞은 토요일이었다. 거기다 이따금 선선한 바람이 부는 맑은 초여름. 먹고 죽자는 선전포고와도 같은 합의가 있은 후, 두 사람은 샤워도 할 수 있을 만큼 양껏 맥주를 사 자리를 잡았다.  목넘김이 시원찮아질 무렵 민재는 소설 같은 거 이제 그만 써야겠다고 투덜거렸다. 그러자 다영이 내놓은 대답이 그것이었다.    모를 소리라고 민재는 생각했다. 물어보는 걸까 권유하는 걸까.    "왜
  • 올리버 워렌
  • 4년 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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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-수-가르침
   자주 마주치는 꼬마가 있었다. 이름은 하연이.  내 바이오리듬은 오후 2시부터 케이블이 끊어진 엘리베이터처럼 뚝 떨어지기 시작해 4시쯤 바닥을 친다. 급히 내린 커피를 들고 바람을 쐬어 나가면 거기에 하연이가 있었다. 극장 앞은 언젠가부터 동네 학원차들의 정류소로 쓰이고 있는 모양이었다. 하연이는 늘 거기 서서 '태릉태권도' 노란 봉고를 기다렸다.  작은 키와 통통한 체격을 보고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지레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. 몇살이냐 열살 쯤 됐냐 물어보자, 6학년이거든요! 하고 욱한 감정 섞인 대답이 돌아온 것이었다(평소
  • 4년 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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